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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리 20년 회고] 주간경향 2015년

by 박순찬 2023.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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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2015.08.04 주간경향 1137호
 

경향신문에 4컷 만화 장도리를 연재한 지도 어느덧 20년이 됐다. 시대의 변화 속에서 하루하루를 만화로 표현하고 기록하며 독자들과 지속적으로 소통한다는 기쁨이 있었고, 역사적으로 중대한 사건을 접하면서도 부족한 실력과 내공 탓에 컷 안에 깊이 있게 담아내지 못함을 한탄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20년 세월이 강물처럼 굽이쳐 흐르는 동안 5명의 대통령을 비롯해 각계의 수많은 인물들이 떠오르고 가라앉았다. 장도리 연재가 시작된 해인 1995년엔 5.18특별법이 제정돼 전직 대통령이 반란수괴죄로 구속됐던 바와 같이 군사독재정권 시대 인물들의 몰락과 함께 민주화 세대 정치인들의 활약을 지켜볼 수 있었다. 또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며 승승장구하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추락이 있었던 시기엔 안철수씨와 같은 벤처기업인이 조명을 받으며 등장하고 있었다.
 
매일 연재되는 신문만화 속에는 이와 같이 많은 인간 군상들의 등장과 퇴장이 그려진다. 화려하게 등장하는 인물이든 스쳐 지나가는 인물이든, 그들은 모두 자신의 시대적 역할이 끝나면 쓸쓸히 무대 뒤편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끊임없이 무대에 서는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웃들이다. 그들은 재벌의 횡포 속에 신음하는 골목길 상점의 주인으로, 심화되는 빈익빈 부익부 경제구조 속에서 소주 한 잔으로 마음을 달래는 샐러리맨으로, 대통령의 공약에 기대를 걸다 뒤통수를 맞은 유권자로 4컷만화 속에서도 언제나 숨 쉬고 있었다.
 
결국 우리의 역사는 역사책에 이름을 남기는 몇몇 사람들이 아니라 공장에서, 골목 상점에서, 사무실에서, 농어촌에서 묵묵히 일하며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고, 그들이 역사의 주인공인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만화나 영화 속 주인공처럼 악당을 소탕하고 해피엔딩을 만들어내는 주인공과는 달리 현실 속 주인공들은 수많은 재앙과 모순 속에서 고통을 받는다.
우리 사회의 주인공들이 진정한 주인공의 역할을 무대 위에서 펼치기 위해 이 땅의 수많 은 구조적 모순과 부패를 걷어내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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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2015.08.11  주간경향 1138호

장도리는 기승전결을 갖춘 가장 짧은 형태인 4컷으로 이루어져 신문을 통해 하루에 한편씩 짧은 시간에 읽을 수 있는 만화다. 한국의 신문독자들이 보편적으로 가지는 공통 관심사를 다루다 보니 주로 정치, 사회문제를 소재로 하고 있다.

매일 연재되는 만화이지만 장편 스토리 만화와 달리 그 내용은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20년의 세월 동안 그려진 장도리를 돌아보니 하루하루의 짧은 만화들이 서로 맥락을 갖고 연결돼 큰 스토리를 이룬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가 아닌 역동적인 스토리를 가진 한국 사회의 변천상이 만화 속에 반영된 것이다.

한국 사회는 각각의 분야에서 때로는 진보하기도 때로는 퇴보하기도 하면서 빠른 속도로 변화해 오며 장대한 스토리를 만들어 왔다.
 
장도리를 20여년 연재하면서 가장 드라마틱한 시기를 꼽으라면 국민들이 헌정사상 최초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를 이룬 김대중 정부 시절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시기에 IMF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각 분야의 글로벌화가 급속히 진행됐으며, 남북 정상회담이 열려 국민들의 대북관에 큰 변화가 생겼고, 대기업 구조조정, IT산업의 발흥과 함께 필자가 몸담고 있는 경향신문사가 사원주주회사로 거듭나고 인터넷 언론이 약진하는 등 언론환경에도 지각변동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드라마틱한 진보적 변화에 가려진 수많은 노동자들의 희생과 빈부차 심화로 서민 들의 고통이 컸었고, 이에 따른 김대중 정부의 개혁정책은 동력을 상실하게 된 측면이 있었다.  카리스마적 리더십에 의한 개혁이 아닌 민주적 방식에 의한 개혁을 통해 다수 시민들 의 권익을 향상시킬 수 있는 진정한 시민사회의 건설이 요구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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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2015.08.18  주간경향 1139호

 
5공 시절, 정권에 대한 비판적 내용을 자주 다루던 4컷 만화 '두꺼비'에는 서산으로 해가 뉘엿뉘엿 지는 느긋한 풍경이 그려지는데, 이 만화 때문에 담당 만화가가 연행되고 연재가 중단되는 사건이 있었다. 대통령의 특정 신체 부위가 연상되는 둥그런 해가 저물어가는 표현을 문제 삼은 것이었다.

이와 같은 혹독한 시대를 벗어나 민주화가 이뤄지면서 신문만화에 대통령의 얼굴이 자유롭게 등장하는 등 점차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성역들이 허물어지게 됐다.

장도리가 연재되던 초창기만 해도 '재벌'이란 단어 대신 '대기업'을 적어넣어야 했고, '좌파'라는 단어는 지금의 '종북'과 같은 마타도어로 인식돼 쉽게 사용할 수 없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봄기운에 눈 녹듯 여러 표현의 제약들이 사라져가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확장돼 가는 언론의 자유 이면에는 또 다른 예속과 제약이 자라나고 있었다. 한국의 언론들은 정치권력의 속박을 벗어나는 대신 자본권력의 영향 하에 들어가게 됐으며, 독재 권력에 대한 민주화 투쟁의 과정을 지나고 보수와 진보를 표방하는 진영의 대립구도가 구축되었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처럼 사회전반을 통해 커져가는 자본권력은 진정한 언론자유를 위축시키고 그로 인해 어렵게 쌓아올린 우리 사회의 민주적 가치들이 훼손될 위기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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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2015.08.25  주간경향 1140호
 

오랜 세월 한국 사회에서는 '만화'라는 장르가 허무맹랑하고 비상식적이고 비현실적 내용을 담은 것으로 매도되었고 아직까지도 그러한 인식이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학생들을 상대로 그려진 교육용 만화를 '학습만화'라고 하고, 인문사회적 내용을 담은 만화를 '교양만화'라고 불러 굳이 '만화'와 구별 지으려 하고 있다. 그리고 신문에 만화를 그리는 필자에게 만화가라는 칭호를 붙이는 것을 미안해하면서 '시사만화가' 또는 '만평가'라고 고쳐 부르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러나 유럽에서 인쇄문화가 발전하면서 태동한 만화는 애초에 권력 또는 현실에 대한 풍자와 비 판을 대중들에게 그림으로 인쇄해 알리기 위한 방식으로 시작한 것이다. 당시의 권력자들은 그들이 유지하고 싶은 세계관에서 벗어난 만화들을 비상식적인 것으로 치부하였다. 2차대전 후 일본에서 등장한 만화 <철완 아톰>은 당시의 보수적 시각으로 봤을 땐 로봇이 날아다니는 등의 허황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지금의 최첨단 로봇기술을 가능하게 한 상상력을 담은 급진적 내용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만화는 현실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그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견하는 내용을 많이 담아 왔지만 주류 엘리트층은 만화를 불온한 것 또는 아이들이나 보는 황당하고 비현실적인 것으 로 바라보았고 그러한 시각을 대중에게도 퍼뜨린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당시 실용노선을 표방한 것과 달리 임기 내내 국민들에게 비현실적 이념을 주입시켰다. 대다수 국민들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은 4대강 사업으로 혈세를 낭비하면서도 70년대식 개발주의 이념을 주창하였고 이러한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실체도 없는 종북이라는 이념의 올가미로 묶으려 했다.

이처럼 허무맹랑하고 비상식적이고 비현실적 생각은 주로 권력층에서 나온다. 오히려 만화는 이러한 권력층의 의도를 벗겨내고 실체를 그려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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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2015.09.01  주간경향 1141호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매일 100m 달리기로 하루 일과를 마치곤 했다. 신문사에서 마감시간에 쫓겨 만화 원고를 들고 책상에서 약 100m 떨어져 있는 스캐너실로 달려가야 했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종이원고를 들고 뛸 필요 없이 액정 태블릿으로 그려진 원고를 사내 전산망을 통해 달리기보다 빠른 빛의 속도로 보낼 수 있는 편리한 작업환경에서 일하고 있다.

독자들의 반응도 예전처럼 드물게 오는 편지나 전화를 통하는 것이 아니라 만화가 인터넷에 게재 된 직후부터 각종 커뮤니티와 SNS에 달리는 댓글을 통해 다양한 의견과 소감을 빠르게 접할 수 있어 작가와 독자 사이의 소통이 원활해졌다. 그러나 이와 같이 빠르게 진보하는 기술문명의 혜택을 누리며 그려지는 만화의 내용은 크게 달라지지 않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장도리가 연재된 해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황금만능주의와 고질적 부패구조의 희생자를 낳은 지 20년이 지나 세월호 참사로 국민들은 또다시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재벌 중심 경제성장 구조의 모순 탓에 외환위기를 겪은 지 20년이 지났지만 재벌 중심의 사회시스템은 더욱 공고해진 상황이다. 게다가 세태를 풍자하는 만화에 작가의 신변을 걱정하는 댓글이 달리고 있는 것을 보면 지금 우리 사회가 다시 1970년대로 돌아간 것은 아닌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한국 사회가 표면적으로는 화려하게 성장한 모습을 과시하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이처럼 정체되거나 후퇴하는 질환을 앓고 있으니 그 고통은 대다수 노동자 서민들이 떠안고 있다.

더 이상의 소재가 없어서 장도리가 재미 없어지는 날을 기다린다는 어느 독자의 댓글은 현실비판의 내용을 담은 만화를 통해 공감과 재미를 느끼는 동시에 어두운 현실을 바라봐야 하는 불편한 심정을 나타내고 있다.

암울한 현실에서 회피하고 싶은 마음은 권력층의 화려한 허구적 구호에 의지하게 만든다. 그러나 힘든 현실일수록 직시하고 해결책을 생각하는 것이 민주사회 시민의 의무일 것이다. 또한 많은 분들이 현실을 바라보는 데 미력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는 것이 지난 20년간 장도리에 성원을 보내주신 독자들에 대한 작가의 의무일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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